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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이 만난사람] 새날학교 이천영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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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새날
댓글 0건 조회 1,550회 작성일 09-02-04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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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이 만난사람] 새날학교 이천영 교장

“가장 소외된 이들 위해 일하고 싶다”
황해윤 nabi@gjdream.com
기사 게재일 : 2009-02-04 06:00:00

광산구 삼도동 조그만 폐교가 분주하다. 쭉 비어 있었던 폐교는 그 동안의 황량함을 벗어내고 새로운 보금자리로 태어나는 중이다. 폐교가 아닌 ‘새날학교’로 말이다. 오는 20일 정식 개교를 앞두고 교사들이 막바지 정리작업에 분주하다. 3년 전에 학교가 만들어졌지만 이제서야 번듯한 보금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그 곳에서 새날학교 이천영 교장을 만났다.



이주 여성·노동자 자녀 위한 대안학교

새날학교는 이주 여성과 이주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대안학교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과 이주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겪는 어려움이 큽니다. 학령기가 돼도 한국어가 안돼 일반학교에서는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적응에 어려움도 겪습니다. 국제결혼 등으로 아이들의 수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현재 우리나라에 약 1만5000여 명 정도가 있지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10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길거리에 방치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천영 교장은 이들을 위한 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3년 전 새날학교를 세웠다.

“5년 전부터 이런 학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녔어요. 지금이야 다문화 가정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지만 당시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정부에 수차례 제안서를 써서 올려봐도 반려당하기 일쑤였습니다. 한국인 자녀들도 돌보지 못하는 상황인데 무슨 외국인이냐는 인식이 많았습니다.”

새날학교를 세우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이 교장은 “하인스 워드가 여론에 오르내리면서 다문화 가정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달라지기 시작한 게 컸다”고 했다. 어쨌든 전국 최초로 이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새날학교가 세워졌다. 지금은 11개국 34명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닌다. 올해는 120명 정도 입학생을 받으려고 계획중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어머니의 결혼으로 한국에 따라 들어온 아이들이 더 심각한 문제예요. 적응이 매우 어렵습니다. 맞벌이 등으로 부모들이 돌볼 수 없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새날학교에서는 현재 11개국에 해당하는 언어로 수업을 진행한다. 베트남, 필리핀, 중국 등에서 온 이주민 중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교사로 활동한다.

“학교가 새로 이전하면서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우리는 새날학교에 다닌다’며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 아이들이 이 곳 학교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갔으면 해요. 그것이 제 꿈입니다.”

현재는 유치부·초·중·고등학교 과정까지 있지만 조만간 고등학교 졸업 후 진학교육까지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사는 것이 지옥이었던 시절 있었다”

“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를 하면서 이주 노동자들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됐고, 그들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사정 때문에 건강센터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또 아이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정을 알게 됐고 그래서 학교를 만들었어요.”

그가 담고 있는 현실이 자연스럽게 새날학교로 이어졌다. 항상 ‘소외된 곳, 어려운 곳에 있자’는 것이 그의 삶의 자세라고 했다.

그의 삶 자체가 그러했다.

“산다는 것이 지옥이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과연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날들이었습니다. 밥 한 끼 먹기 위해 죽도록 일하던 날들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12살 때 공단으로 들어갔다. 당시는 9살 10살 짜리도 공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시절이었다. 끼니와 잠자리만 제공받으면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노동강도는 살인적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일했다고 했다. 너무 힘들어 쉬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해 일하다 쓰러진 적도 있었다. 해고라도 당하면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가 막연했기 때문이었다. 긴 노동시간과 체불임금으로 고통을 받았다. 대부분 비슷했다. 비슷한 시기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몸을 불살랐다.

“그 때는 분노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죠. 세상이 엎어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해요. 데모라도 나면 앞장 서겠다고도 하고. 전쟁이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그러면 빵집부터 털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은행을 털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5·18때도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이 앞장섰잖아요.”

군대를 가야 할 나이 그는 ‘학력 미달’로 군면제를 받았다. 검정고시를 봤다. 교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스러져가는 가족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1년 만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26살부터 영어교사를 시작했다.

교사 생활 24년 동안 그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러나 늘 자신이 돌아갈 곳은 이주 노동자·이주 여성·이주 아동들이 살아가는 현장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현재 새날학교에 서 있는 이유다.

“아직도 현실은…”

몇 십년이 흘렀지만 그가 공단 노동자로서 겪었던 열악한 현실은 2009년에도 비슷하게 재현되고 있다.

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 소장이기도 한 그는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운 사정을 가장 가까이서 듣는다. 경제 위기로 이주 노동자들이 겪는 타격이 크다.

“요즈음 해고와 체불임금으로 오갈 데 없는 이주 노동자들이 길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몇 개월 동안 일자리를 찾고 있는데 일자리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아요. 이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곧바로 생계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사회적 안전망에서도 비켜서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 같은 문제에 관심도 대책도 없다.

새날학교도 어려움이 많다. 정부 지원을 일부 받지만 재정문제가 가장 크다. 아직은 교사도 부족하고 교실도 부족하다. 학교 옆으로는 부모가 돌보기 어려운 아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기숙사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여기 저기 후원으로 여기까지 왔다.

“번듯한 공간이 생겼잖아요. 가장 소외되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그는 이번에 24년 동안의 평교사 생활을 정리한다. 교사 생활도 행복했지만 이곳 새날학교에서 할 일이 더 많다고 했다. 그리고 새날학교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하다고 했다. 이곳 일에 좀더 전력을 다하기 위해 평교사 생활을 접기로 결심했다. 조그만 폐교에 조만간 봄소식이 들리겠다.

글=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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